
저도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솔직히 주인공 엄중호가 그냥 악덕 포주로만 보였습니다. 매춘부들을 자기 자산으로만 여기고, 사라진 여자들을 찾으러 다니는 이유도 빌려준 돈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남자가 보여주는 처절한 몸부림에 점점 빠져들었고, 마지막에는 제가 응원하고 있더라고요. 2008년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데뷔작 <추격자>는 한국 스릴러 영화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작품입니다.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단순한 범죄 재연이 아니라 무너진 시스템과 그 속에서 혼자 싸우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려냈습니다.
포식자에서 인간으로, 엄중호라는 캐릭터가 주는 울림
엄중호는 전형적인 영웅이 아닙니다. 전직 형사 출신이지만 부패로 파면당했고, 지금은 출장 안마소를 운영하며 여성들을 착취하는 인물이죠. 영화 초반 그에게 김미진은 구해야 할 생명이 아니라 자기 돈을 떼먹고 도망간 '물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미진의 딸 은지를 만나고, 경찰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홀로 미진을 찾아 헤매며 그는 서서히 변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엄중호의 변화가 갑작스러운 개과천선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는 여전히 거칠고,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하지만 미진이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에 매달리고, 은지를 돌보며 자신도 모르게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엄중호가 병원에서 은지의 보호자란에 자기 이름을 적는 장면이었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볼펜을 집어드는 그 순간, 저는 이 남자가 진짜 변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영화평론가 김혜리는 이 영화를 두고 "관객을 인질로 잡을 줄 아는 독한 신인의 등장"이라고 평했습니다(출처: 씨네21). 엄중호라는 캐릭터가 관객을 사로잡는 이유는 그가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결함투성이지만 최선을 다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공권력이 포기한 정의를 사적인 방식으로라도 되찾으려는 그의 모습은 비극적이면서도 절박합니다. 엄중호의 변화를 보여주는 핵심 장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초반: 사라진 여자들을 '도망간 것'으로만 여기고 돈만 추궁함
- 중반: 미진이 살아있을 거라 믿고 밤새 골목을 헤맴
- 후반: 은지를 챙기고, 미진의 유품을 보며 오열함
이런 점진적 변화가 관객에게 설득력을 주고, 결국 우리는 이 파렴치한 포주를 응원하게 됩니다.
추격자 속 국가 시스템의 무능과 방조, 그리고 그 속에서 느낀 분노
제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답답했던 건 범인 지영민의 잔혹함보다, 그를 놓쳐버리는 경찰의 무능함이었습니다. 지영민은 파출소에서 "안 팔았어요, 죽였어요"라고 자백까지 했는데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납니다. 기동수사대는 서울시장 인분 테러 사건 때문에 공을 세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정작 미진의 생사는 뒷전입니다. 슈퍼마켓에서 미진이 살해당할 때 경찰은 순찰차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죠. 이런 묘사가 과장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유영철 사건 당시 경찰의 대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유영철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20여 명을 살해했는데, 경찰은 초기에 사건들을 연계하지 못했고 수사에 혼선을 빚었습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영화는 이런 실제 사건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풍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과연 국가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영화 속 경찰은 관료주의와 의전에 매몰되어 시민의 생명을 방치합니다. 문화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를 "스릴러의 형식을 빌려 국가라는 시스템이 개인을 얼마나 처참하게 방치할 수 있는지를 폭로하는 사회비판 드라마"라고 평가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단순한 범죄 스릴러를 넘어 시스템 비판 영화로 읽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영민이라는 괴물은 시스템의 빈틈이 키워낸 산물입니다. 경찰이 제대로 수사했더라면, 초기에 사건을 연계했더라면, 미진은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고, 결국 한 시민이 홀로 싸워야 했습니다. 영화 속 경찰의 무능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지영민을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함
- 미진이 신고한 슈퍼마켓 출동 요청을 무시하고 낮잠 잠
- 기동수사대가 엉뚱한 곳에서 시신을 찾으며 시간 낭비함
이런 장면들이 쌓이며 관객은 분노와 무력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제가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볼 때 주변 관객들이 한숨을 쉬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만큼 이 영화는 현실의 문제를 정확히 건드렸습니다. <추격자>는 2008년 개봉 당시 507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고,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되는 등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습니다. 김윤석과 하정우는 이 영화로 연기파 배우로 확실히 자리매김했죠. 하지만 제게 이 영화가 남긴 가장 큰 인상은 흥행 성적이나 배우들의 연기가 아니라, '우리는 정말 보호받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엄중호가 마지막에 은지의 손을 잡고 있는 장면은 슬프면서도 따뜻했습니다. 시스템이 지키지 못한 것을 한 개인이 지켜낸 순간이었으니까요. 이 영화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군가를 추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방관하고 있습니까?
참고: https://namu.wiki/w/%EC%B6%94%EA%B2%A9%EC%9E%90, https://www.youtube.com/watch?v=2uV5kh_vduc, 나홍진 (2008). 추격자 제작 노트 및 감독 인터뷰, 씨네21 (2008). [커버스토리] <추격자>, 한국 스릴러의 새로운 문법을 쓰다, 이동진 (2008). 이동진의 영화 풍경 - <추격자> 리뷰,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추격자(The Chaser) 상세 정보 및 비평 기록, 표창원 (2011). 한국의 연쇄살인, 학술논문 (2010). 한국 스릴러 영화에 나타난 국가 기구의 재현 방식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