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욱 감독의 2016년 작품 '아가씨'는 단순한 시대극 스릴러를 넘어 권력과 욕망, 계급과 젠더의 복잡한 관계를 세밀하게 직조한 영화입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세 개의 시점으로 나뉘어 관객에게 끊임없는 반전과 재해석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사기와 배신의 플롯이지만, 그 안에는 여성 주체성의 회복과 연대, 그리고 남성 중심 폭력 구조에 대한 저항이 촘촘히 짜여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영화의 서사 구조적 특징과 젠더 권력 관계, 그리고 시각적 쾌락의 양가성을 중심으로 '아가씨'가 던지는 질문들을 탐색합니다.
3부작 서사구조와 관점의 전복
영화 '아가씨'는 제1부, 제2부, 제3부로 명확하게 구분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1부는 남숙희의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도둑의 딸이자 고아인 숙희는 소매치기와 버려진 아기를 일본 부잣집에 팔아넘기며 생계를 유지하는 인물입니다. 후지와라 백작이라 자칭하는 사기꾼이 찾아와 부유한 일본 여성 이즈미 히데코를 꼬셔 결혼한 뒤 정신병원에 넣고 재산을 차지하자는 계획을 제안하고, 숙희는 히데코의 하녀로 들어가 이 음모에 가담합니다. 관객은 숙희의 눈을 통해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 히데코를 보게 되며, 점차 히데코가 백작에게 빠져드는 과정을 지켜봅니다. 그러나 제1부의 끝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은 히데코가 아니라 숙희였습니다. 히데코는 갑자기 하녀의 말투와 행동을 하며 숙희를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숙희는 "우리 이즈미 히데코 아가씨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그분은 처음부터 그냥 나쁜 년이다"라는 독백과 함께 배신당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제2부는 히데코의 시점으로 돌아가 사건의 진실을 보여줍니다. 히데코는 애초부터 후지와라 백작과 공모 관계였으며, 숙희를 속여 정신병원에 보낼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가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이모부 코우즈키에게 물리적·정신적·성적 학대를 받으며 자란 영리하고 계산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히데코는 이모부의 음란 서책 수집 취미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변태적인 남성들 앞에서 야설을 낭독해야 했고, 이모는 결국 벚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습니다. 후지와라 백작은 이런 히데코의 상황을 이용해 재산을 반으로 나누고 서로 자유를 얻자는 거래를 제안했고, 히데코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히데코는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로해주는 숙희에게 점차 마음을 열게 됩니다. 숙희가 "아가씨를 낳다가 돌아가신 어머니는, 아가씨를 낳고 분명 후회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히데코는 처음으로 자신을 대상이 아닌 주체로 대해주는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 구성 | 시점 | 핵심 서사 | 관객의 인식 |
|---|---|---|---|
| 제1부 | 남숙희 | 하녀가 본 순진한 아가씨 | 히데코는 피해자 |
| 제2부 | 이즈미 히데코 | 아가씨가 꾸민 계획의 진실 | 히데코는 공모자이자 생존자 |
| 제3부 | 통합 시점 | 두 여성의 연대와 탈출 | 둘 다 주체이자 구원자 |
제2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히데코가 벚나무에 목을 매달려 자살하려 할 때입니다. 숙희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낀 히데코는 밧줄을 들고 벚나무로 향하고, 숙희는 이를 발견하고 달려가 "죽지 말라"고 사정합니다. 이때 히데코는 "숙희야, 내가 걱정 돼? 난 네가 걱정돼"라는 명대사를 남기며 자신도 숙희를 정신병원에 보낼 계획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계획을 털어놓고, 대신 후지와라 백작을 이용해 진짜 자유를 얻기로 합의합니다. 관객은 이 순간 처음으로 두 여성이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서로의 구원자가 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됩니다. 히데코는 숙희를 데리고 이모부의 서재로 가서 평생 낭독해야 했던 음란 서책들을 보여주고, 숙희는 분노하며 그 책들을 전부 찢고 물에 담가 망가뜨립니다. 히데코는 이 장면에서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라는 독백을 남깁니다.
아가씨 속 젠더권력 구조와 남성 폭력의 메커니즘
'아가씨'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라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안에서 작동하는 젠더 권력 구조는 보편적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여성을 대상화하고 착취합니다. 이모부 코우즈키는 본래 조선인이었으나 일본에 협력해 금광 채굴권을 얻었고, 일본인이 되고 싶은 욕망에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성씨까지 바꾼 인물입니다. 그는 음란 서책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린 히데코에게 남성들 앞에서 야설을 낭독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학대가 아니라 권력의 과시이자, 여성을 성적 대상이자 볼거리로 소비하는 구조적 폭력입니다. 코우즈키는 히데코의 이모와 결혼했지만 이모가 자살한 후에는 처조카인 히데코와 약혼까지 한 상태입니다. 이는 히데코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법적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히데코를 평생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는 의도입니다. 코우즈키가 히데코에게 반복적으로 "지하실을 절대 잊지 말아라"라고 협박하는 장면은, 물리적 공간이 어떻게 심리적 감옥으로 기능하는지 보여줍니다. 지하실은 히데코가 낭독 연습을 하고 남성 관객들의 시선을 감내해야 했던 장소이며, 동시에 코우즈키가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는 무대입니다. 후지와라 백작 역시 표면적으로는 히데코를 사랑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재산을 노리는 사기꾼입니다. 그는 히데코가 절대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하며 계획을 세웠고, 이는 히데코를 감정이 없는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입니다. 백작은 그림을 가르치는 척하며 히데코에게 접근하지만, 그의 관심은 오직 돈에만 있습니다. 숙희에게도 그는 "히데코를 꼬드겨서 백작을 사랑하게 만들라"고 지시하며, 여성의 감정을 조작 가능한 도구로 취급합니다. 영화는 이런 남성들의 폭력이 단순히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적·심리적·구조적 차원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섬세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영화의 제3부에서 이 남성 중심 권력 구조는 무너집니다. 히데코는 결혼식 때 백작에게서 받은 아편을 포도주에 타서 키스로 먹이며 그를 기절시키고, 숙희와 함께 재산을 들고 도주합니다. 백작은 코우즈키의 해결사들에게 잡혀가 고문을 당하는데, 코우즈키는 제본기로 백작의 손가락을 자르고 드릴로 손을 뚫는 잔혹한 장면을 연출합니다. 이때 코우즈키는 "잠자리에서 히데코는 어땠냐"고 묻지만, 사실 백작은 히데코와 단 한 번도 성관계를 하지 않았습니다. 결혼 첫날 밤 히데코는 은장도를 들고 백작을 협박했고, 자위행위로 신음을 만들고 손바닥을 베어 피를 이불에 뿌려 흔적을 위조했습니다. 백작은 마지막 순간 수은이 든 담배를 피워 지하실에 독성 연기를 가득 채우고, 코우즈키와 함께 죽습니다. 그의 마지막 대사인 "자지는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는 남근주의에 대한 비틀린 조롱처럼 들립니다.
시각적쾌락의 양가성과 관음의 윤리
'아가씨'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탐미적 영상미와 대담한 에로티시즘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특히 숙희와 히데코 사이의 관능적인 장면들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두 여성이 서로의 욕망을 확인하고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그려집니다. 첫 번째 키스 장면에서 숙희는 "후지와라 백작과 이렇게 해보라"며 히데코에게 연습시키지만, 곧 둘 다 진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후 본격적인 성관계 장면에서는 히데코가 주도권을 잡는데, 평생 야설을 낭독하며 쌓은 간접적 지식을 이용해 커닐링구스, 69, 좌위, 가위치기 등 다양한 체위를 시도합니다. 이 장면은 여성의 욕망이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탐구적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장면들이 관객에게 제공하는 시각적 쾌락의 윤리적 위치는 복잡합니다. 영화는 남성 중심적 시선을 비판하면서도, 카메라 자체는 때때로 관음적 위치에 서게 됩니다. 숙희와 히데코의 나체를 클로즈업하거나, 성행위 장면을 미학적으로 연출하는 순간들은 해방의 언어인 동시에 소비의 대상이 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관객은 이 장면들을 보며 두 여성의 사랑을 응원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친밀함을 '구경'하는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이는 영화가 의도적으로 남겨둔 불편함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그들의 자유를 지지하는가, 아니면 그저 아름다운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는가? 영화는 이 질문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기 위해 코우즈키의 낭독극 장면을 대비시킵니다. 히데코가 남성 관객들 앞에서 음란 서책을 낭독하는 장면은 노골적으로 불편하고 폭력적입니다. 관객은 이 장면에서 히데코를 '보는' 남성들을 혐오하게 되지만, 동시에 자신도 영화 내내 히데코와 숙희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런 시각적 쾌락의 양가성을 의식적으로 다루며, 관객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히데코가 서재의 서책들을 찢고 잉크를 뿌리는 장면은 단순히 이모부의 수집품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대상화했던 시선 자체를 파괴하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 장면 | 해방의 언어 | 관음의 위험 |
|---|---|---|
| 첫 키스 | 욕망의 자각 | 친밀함의 구경 |
| 성관계 | 주체성 회복 | 나체의 소비 |
| 서책 파괴 | 시선의 전복 | 폭력의 카타르시스 |
마지막 장면에서 숙희와 히데코는 상하이행 배를 타고 히데코가 남장을 하고 백작의 여권을 이용해 탈출합니다. 백작의 본명이 고판돌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그의 허세가 완전히 벗겨지고, 두 여성은 나체로 은방울을 가지고 서로의 음부에 넣으며 만월을 바라봅니다. 이 장면은 에로틱하면서도 동시에 해방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관객은 여전히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며, 영화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감독은 아름다움과 잔혹함, 해방과 소비를 한 화면에 겹쳐놓으며 관객에게 스스로의 위치를 질문하게 만듭니다. '아가씨'는 속임수의 쾌감을 통해 권력과 욕망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3부작 구조를 통해 관객의 확신을 끊임없이 뒤흔들고, 젠더 권력 구조를 정교하게 해체하며, 시각적 쾌락의 윤리적 위치를 질문합니다. 두 여성의 사랑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거짓말로 가득한 세계에서 진실을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영화가 남기는 불편한 질문들—우리가 응원한 해방은 정말 해방인가, 고통의 전시 없이도 같은 이야기가 가능했을까, 관객인 우리는 소비자인가 연대자인가—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래 남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아름다움과 잔혹함을 겹쳐놓으며, '아가씨'를 가장 논쟁적이고 불온한 사랑 이야기로 완성시켰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영화 '아가씨'는 어떤 원작을 바탕으로 했나요? A. '아가씨'는 영국 작가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Fingersmith)'를 원작으로 합니다. 원작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이를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으로 옮겨 각색했습니다. 원작의 계급 구조와 젠더 권력 관계를 한국적 맥락에 맞게 재해석한 것이 특징입니다. Q. 영화에서 히데코가 낭독하는 서책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책인가요? A. 영화에 등장하는 음란 서책들은 대부분 제작진이 창작한 내용입니다. 다만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 일본에서 실제로 유행했던 춘화와 음서(音書) 문화를 참고했습니다. 특히 문어와 해녀 그림은 일본 우키요에의 유명한 춘화 '타코와 해녀(蛸と海女)'를 오마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Q.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여성이 사용하는 은방울은 어떤 의미인가요? A. 은방울은 영화 초반부터 히데코의 방에 보관되어 있던 물건으로, 전통적으로 성적 쾌락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여성이 은방울을 함께 사용하는 것은 이제 그들이 남성의 시선이나 통제 없이 자신들만의 욕망을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게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동시에 이모부가 강요했던 성적 대상화의 도구를 그들 스스로의 해방과 친밀함의 언어로 전유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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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위키 - 아가씨(영화): https://namu.wiki/w/%EC%95%84%EA%B0%80%EC%94%A8(%EC%98%81%ED%9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