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를 처음 봤을 때 최익현이라는 캐릭터가 이렇게까지 씁쓸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줄 몰랐습니다. 주먹도 없고, 배짱도 없지만 '족보' 하나로 험난한 80~90년대 부산 뒷골목을 헤쳐나가는 이 남자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펐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영화를 보면서 "이게 정말 영화 속 이야기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의 민낯일까?"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족보와 인맥으로 버티는 반달의 생존법, 최익현은 왜 공감되는가
최익현(최민식)은 전형적인 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세관 공무원 출신의 비리 연루자로, 해고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연히 손에 넣은 히로뽕 10kg를 처분하려다 조폭 두목 최형배(하정우)를 만납니다. 여기서 그가 내세우는 유일한 무기는 실력도 무력도 아닌 '촌수'입니다. "느그 아부지, 우리 형님의 할부지의 9촌 동생의 손자가 바로 익현씨인기라"라는 대사는 웃기지만, 동시에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연고주의(Connectionism)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여기서 연고주의란 혈연·지연·학연 등 개인적 관계를 바탕으로 사회적 자원을 배분하는 비공식적 네트워크를 의미합니다(출처: 한국사회학회). 제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최익현이 보여주는 '가장으로서의 무게'였습니다. 그는 분명 비리를 저질렀고, 조폭과 손을 잡았으며, 심지어 동족인 최형배마저 배신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가족이었습니다. 아들을 검사로 만들기 위해 온갖 굴욕을 감내하고, 족보를 들이대며 무릎을 꿇고, 심지어 생매장 위협까지 당하면서도 살아남습니다. 씨네21의 평론에 따르면, 최익현은 "가족 부양이라는 명분 아래 온갖 비리를 정당화하는 한국적 가부장의 전형"입니다. 시스템의 공정성보다 '누구를 아느냐'가 생존의 핵심이었던 시대를 살아낸 그의 몸부림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안타깝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최익현이라는 캐릭터에게서 우리 사회 아버지 세대의 왜곡된 초상을 봅니다. 그들은 공정한 룰보다는 인맥을 믿었고, 떳떳함보다는 생존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옳았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지만, 그 시대를 살아낸 이들의 선택지가 과연 얼마나 많았을까요? 최익현의 비루함은 곧 우리 사회의 비루함이기도 합니다.
'범죄와의 전쟁'은 정의였나, 권력의 쇼였나
영화의 제목이자 핵심 사건인 1990년 10월 '10.13 특별선언(범죄와의 전쟁)'은 극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노태우 정부는 전국의 조직폭력배를 일망타진하겠다고 선포했고, 실제로 수백 명의 조폭이 체포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이런 의문이 듭니다. 이것이 정말 정의의 구현이었을까요, 아니면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쇼'였을까요? 조범석 검사(곽도원)는 얼핏 정의로운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는 최익현을 철저히 수사하고, 뇌물에 흔들리지 않으며, 심지어 최익현의 급소를 구둣발로 밟으며 "넌 내가 깡패라고 하면 그냥 깡패야"라고 단언합니다. 하지만 결말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씁쓸합니다. 조범석은 결국 최익현이라는 '연결 고리'를 이용해 고위 인사들과 줄을 대고, 법무부 검찰국장까지 올라갑니다. 여기서 검찰국장이란 검사장급 보직으로, 검찰의 인사권과 예산권을 쥔 핵심 요직을 의미합니다(출처: 대검찰청). 쉽게 말해, 검찰 조직 내에서 거의 최상위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한국영화학회의 연구 논문에 따르면, 이 영화는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과정에서 합법적 폭력(Legal Violence, 검찰)과 불법적 폭력(Illegal Violence, 조폭)이 어떻게 공생하고 배신하는지를 보여주는 권력의 역학 조사"입니다. 범죄를 소탕한다는 명분이 사실은 정권의 정통성 확보와 권력 재편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않았느냐는 의심은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씁쓸한 진실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소름 끼쳤던 장면은 최익현이 조범석에게 최형배를 넘기는 대목이었습니다. 최익현은 살아남기 위해 혈연이라는 족보마저 버리고 공권력에 붙습니다. 그리고 조범석은 그 대가로 출세 가도를 달립니다. 과연 여기서 누가 진짜 '나쁜 놈'일까요? 칼을 든 조폭일까요, 아니면 법복을 입은 권력자일까요? 영화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지만, 관객은 본능적으로 압니다. 진짜 나쁜 놈들은 감옥이 아니라 더 높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요. 영화가 끝나고 나면 한 가지 궁금증이 남습니다. 최익현의 아들 주한은 검사가 되었습니다. 사법연수원 차석 출신으로,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조범석이라는 강력한 뒷배까지 있습니다. 과연 그는 아버지의 '더러운 유산'을 완전히 끊어냈을까요? 영화는 아들을 검사로 만듦으로써 최익현이 꿈꾸던 완벽한 신분 세탁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한국 사회의 권력 카르텔이 다음 세대에서는 '법치'라는 더 세련된 가면을 쓰고 진화했음을 암시합니다. "과연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는 끝났는가, 아니면 더 교묘하게 이어지고 있는가?"라는 의문은 2026년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입니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캐릭터의 힘과 시대적 공기가 완벽하게 결합한 수작입니다. 최민식의 능글맞은 생존력과 하정우의 묵직한 카리스마는 한국 영화사에서 손꼽히는 앙상블을 보여줍니다. 비록 남성 중심적 서사와 여성 캐릭터의 부재라는 한계는 명확하지만, 혈연과 학연이라는 한국적 폐습이 어떻게 권력이 되는지를 이보다 더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은 찾기 어렵습니다. 장르 영화의 재미와 사회 비판적 통찰을 동시에 거머쥔, 제목 그대로 '수작들의 전성시대'를 대표하는 영화였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B%B2%94%EC%A3%84%EC%99%80%EC%9D%98%20%EC%A0%84%EC%9F%81:%20%EB%82%98%EC%81%9C%EB%86%88%EB%93%A4%20%EC%A0%84%EC%84%B1%EC%8B%9C%EB%8C%80
https://namu.wiki/w/%EB%B2%94%EC%A3%84%EC%99%80%EC%9D%98%20%EC%A0%84%EC%9F%81:%20%EB%82%98%EC%81%9C%EB%86%88%EB%93%A4%20%EC%A0%84%EC%84%B1%EC%8B%9C%EB%8C%80/%EB%93%B1%EC%9E%A5%EC%9D%B8%EB%AC%BC
https://namu.wiki/w/%EB%B2%94%EC%A3%84%EC%99%80%EC%9D%98%20%EC%A0%84%EC%9F%81:%20%EB%82%98%EC%81%9C%EB%86%88%EB%93%A4%20%EC%A0%84%EC%84%B1%EC%8B%9C%EB%8C%80/%EC%A4%84%EA%B1%B0%EB%A6%AC
https://www.youtube.com/watch?v=EFvnWpMPbJE&t=630s
윤종빈 (2012). 범죄와의 전쟁 제작기: 아버지들의 시대를 말하다
씨네21 (2012). [비평] '범죄와의 전쟁', 족보와 주먹이 빚어낸 한국적 누아르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상세 정보
이동진 (2012). 이동진의 영화 풍경 - <범죄와의 전쟁> 리뷰
학술논문 (2014). 한국 남성 누아르 영화에 나타난 연고주의와 가부장성 연구: '범죄와의 전쟁'을 중심으로
Cineaste (2012). Review: Nameless Gangster - Rules of the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