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고백하면, 저는 처음 반도 예고편을 봤을 때 "이건 부산행이랑 전혀 다른 영화잖아"라고 실망했습니다. 달리는 열차 안의 공포를 기대하며 극장에 들어갔다가, 자동차가 좀비 떼를 볼링핀처럼 튕겨내는 장면을 보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반도가 잘 만든 영화인지, 아닌지를 놓고 지금도 의견이 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하이스트 무비와 포스트 아포칼립스 사이에서
반도는 장르적으로 독특한 위치에 있는 작품입니다. 좀비물이라는 껍데기를 두르고 있지만, 내부 구조를 뜯어보면 하이스트 무비에 가깝습니다. 하이스트 무비란 돈이나 목표물을 탈취하기 위해 팀이 구성되고, 임무 수행 중 예상치 못한 변수가 터지는 형식의 장르물을 말합니다. 홍콩 삼합회의 의뢰를 받아 2,000만 달러짜리 트럭을 회수하러 반도로 들어가는 정석 일행의 구조가 정확히 이 문법을 따릅니다. 여기에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적 세계관이 덧입혀집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란 문명이 붕괴한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살아남은 자들이 새로운 질서 혹은 혼돈 속에서 생존을 이어가는 이야기 구조를 뜻합니다. 반도가 보여주는 4년 뒤 서울의 풍경, 잡초로 뒤덮인 도로, 침수된 건물들은 이 장르의 전형적인 미장센을 성실하게 구현해냈다고 봅니다. 제가 직접 보고 놀랐던 건, 공간 설계 방식이었습니다. 부산행이 KTX라는 선형(linear) 공간 안에서 앞과 뒤로만 움직이며 공포를 조성했다면, 반도는 도시 전체라는 평면 위에서 자동차가 자유롭게 이동하는 구조입니다. 이 변화는 영화의 긴장감을 조성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버렸고,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가 됩니다. 한국 영화 산업 측면에서도 반도는 의미 있는 사례입니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 2020년 결산 자료에 따르면, 코로나19로 극장가 전체가 침체된 해에 반도는 약 381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해 한국 영화 흥행 3위를 기록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이 수치는 같은 해 개봉한 다른 텐트폴 영화들이 손익분기점조차 넘지 못한 상황을 감안하면 상당한 성과였습니다.
반도 속 631부대가 드러낸 인간 본성의 문제
반도에서 저를 가장 오래 생각하게 만든 건 좀비가 아니라 631부대였습니다. 좀비보다 사람이 더 무서울 수 있다는 명제를 이 정도로 직접적으로 형상화한 한국 영화는 흔치 않으니까요. 631부대는 원래 재난 초기에 민간인을 구조하던 대한민국 육군 부대입니다. 그런데 국가 시스템이 붕괴하고 외부와의 단절이 4년 넘게 이어지면서, 이들은 생존자를 '들개'라 부르며 좀비와의 생존게임을 도박으로 즐기는 집단으로 변합니다. 이는 아노미(Anomie) 상태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설정입니다. 아노미란 사회 규범과 질서가 붕괴해 개인이 행동 기준을 잃고 혼돈 속에 빠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설정이 설득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관객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립니다. 특수부대 출신 군인들이 고작 4년 만에 저 정도로 타락하는 게 현실적이냐는 반론도 타당합니다. 저 역시 극 중 황 중사의 캐릭터가 지나치게 단순한 악으로 소비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극단적인 고립과 절망감이 어떻게 인간을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과장된 알레고리(Allegory)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알레고리란 표면적 이야기 뒤에 다른 층위의 의미를 숨기는 서사 기법입니다. 반면 민정 가족이 보여주는 연대는 그 반대편에 있습니다. 이들이 4년간 반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제도나 무기가 아니라, 서로를 잃지 않으려는 의지였습니다. 특히 RC카를 이용해 좀비를 유인하는 유진의 모습은, 이 세계를 지옥이 아니라 자신의 세상으로 받아들이고 적응해온 아이들의 생존 방식을 보여줍니다. 그게 묘하게 더 가슴에 박혔습니다.
카 체이싱 액션의 성취와 신파의 한계
반도를 둘러싼 평가 중 가장 첨예하게 갈리는 부분은 후반부 카 체이싱 시퀀스와 신파적 연출 사이의 충돌입니다. 카 체이싱(Car Chasing) 시퀀스란 자동차들이 고속으로 추격전을 벌이는 영화적 장치로, 속도감과 공간 활용 능력이 핵심입니다. 반도의 카 체이싱은 한국 영화에서 이 규모를 시도한 첫 사례에 가깝습니다. 좀비 떼라는 환경 요소를 자동차 추격전에 접목한 아이디어 자체는 신선했고, 이레가 연기한 준이의 드리프트 장면은 실제로 보고 나서 "이건 예상 밖이었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박진감이 있었습니다. 다만 이 시퀀스가 끝나고 나서 이어지는 신파 연출은 솔직히 버거웠습니다. 신파란 과도한 감정적 자극을 통해 관객의 눈물을 유도하는 연출 방식을 말하는데, 슬로우 모션과 현악 중심의 음악이 반복적으로 삽입되면서 앞서 쌓아올린 긴장감이 허물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부분은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씨네21 평론가들도 신파가 축적된 감정을 오히려 휘발시킨다는 지적을 공통적으로 언급했습니다. 반도에서 주목할 만한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비주얼의 완성도: 황폐화된 서울의 미장센은 한국 영화 중 가장 체계적으로 구현된 사례 중 하나
- 하이스트 무비 구조의 적용: 좀비물과 장르 혼합을 시도한 점에서 한국형 장르 확장의 시도
- 카 체이싱 시퀀스의 기술적 성취: 좀비 환경 요소와 자동차 추격전의 접목이라는 신선한 시도
- 신파 연출의 과잉: 후반부 감정 유도 방식이 영화의 리듬을 반복적으로 끊는 문제
- 631부대 악역의 서사 부족: 캐릭터 설정은 흥미롭지만 깊이 있는 동기 부여가 부족
CGI(Computer-Generated Imagery, 컴퓨터로 만들어낸 시각 효과) 완성도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카 체이싱 장면에서 좀비들이 차에 튕겨나갈 때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지적은 제가 봐도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조 처리가 이 단점을 감추기 위한 의도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한국 영화의 VFX(Visual Effects, 후반 시각 효과 작업) 기술력이 할리우드와의 격차를 좁히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반도의 CG는 아직 그 경계선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출처: 씨네21). 반도는 완성도 면에서 부산행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고, 저도 그 판단에 크게 반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가 K-좀비 장르를 단순한 호러 이상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 그리고 그 시도가 완전히 실패하지는 않았다는 점은 인정하고 싶습니다. 좋은 영화냐는 논쟁과 별개로,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분명히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극장에 간 시간이 완전히 허무하지는 않았습니다. 반도를 두고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아직 고민 중이라면, 부산행과 별개의 작품으로 보고 접근하는 것이 가장 공정한 출발점이 될 것 같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B%B0%98%EB%8F%84(%EC%98%81%ED%99%94)
https://namu.wiki/w/%EB%B0%98%EB%8F%84(%EC%98%81%ED%99%94)/%EB%93%B1%EC%9E%A5%EC%9D%B8%EB%AC%BC
https://namu.wiki/w/%EC%97%B0%EB%8B%88%EB%B2%84%EC%8A%A4/%EC%84%A4%EC%A0%95
https://namu.wiki/w/%EB%B0%98%EB%8F%84(%EC%98%81%ED%99%94)/%EC%A4%84%EA%B1%B0%EB%A6%AC
https://www.youtube.com/watch?v=FmH3BDOoWBU
씨네21 [비평] 반도, 연상호가 설계한 거대한 폐허의 미학
영화진흥위원회(KOFIC) 한국 영화 산업 결산 보고서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