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승완 감독의 2023년 신작 <밀수>가 개봉 17일 만에 손익분기점인 400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저 역시 개봉 주말에 극장을 찾았는데요, 솔직히 말하면 '또 류승완표 액션이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 예상과는 전혀 다른 여운이 남더군요. 70년대 서해안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범죄활극은 단순한 오락영화를 넘어, 여성 연대와 생존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품고 있었습니다.
바다가 뒤집는 권력구조, 수중액션의 새로운 지평
<밀수>의 가장 큰 매력은 단연 '수중 액션 시퀀스(Underwater Action Sequence)'입니다. 여기서 수중 액션 시퀀스란 물속에서 펼쳐지는 전투·추격 장면을 의미하며, 중력이 아닌 부력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캐릭터들이 벌이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담은 영화적 장치입니다. 제가 직접 극장에서 봤을 때, IMAX 포맷으로 상영되는 수중 장면의 몰입감은 정말 압도적이었습니다. 육지에서 조춘자(김혜수)와 엄진숙(염정아)은 남성 권력자들에게 쫓기는 약자입니다. 권 상사(조인성)와 장도리(박정민) 같은 인물들이 무력과 자본으로 이들을 억압하죠. 하지만 영화는 공간을 바다로 옮기는 순간, 이 권력관계를 완전히 뒤집어버립니다. 물속에 들어서면 해녀들은 숨을 참는 법과 물길을 읽는 법을 아는 진짜 강자가 되고, 총과 칼을 든 남성들은 허우적대는 이방인으로 전락합니다. 2024년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밀수>는 제작비 175억 원 중 상당 부분을 수중 촬영 장비와 해녀 배우들의 3개월간 잠수 훈련에 투자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실제로 김혜수와 염정아를 비롯한 주연 배우들은 수심 6미터 수조에서 직접 액션을 소화했다고 하는데요, 그 진정성이 화면에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화의 수중 액션은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공간의 물리적 변화가 곧 권력의 재배치로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담은 서사적 장치였습니다. 특히 후반부 해녀들이 장도리 패거리를 물속에서 제압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상어가 출몰하는 위험한 수역에서도 해녀들은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협력하여 적을 무력화시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며 '아, 이게 진짜 류승완표 액션의 진화구나' 싶었습니다. 단순히 주먹과 발차기로 승부를 보는 게 아니라, 공간의 특성을 극대화한 전략적 액션이었으니까요.
밀수 속 의심을 넘어선 연대, 여성 서사가 빛나는 이유
<밀수>는 표면적으로는 밀수품을 둘러싼 범죄 스릴러지만, 그 이면에는 두 여성의 관계 회복 드라마가 자리합니다. 영화 초반, 진숙은 춘자를 배신자로 의심합니다. 2년간의 수감 생활 동안 주변 사람들이 "춘자가 밀고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진숙은 그 말만 믿고 절친을 원수로 낙인찍어버리죠. 여기서 흥미로운 건 진숙이라는 캐릭터의 양면성입니다. 시스터후드(Sisterhood)는 여성들 간의 우애와 연대를 뜻하는 개념으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들이 서로를 지지하고 함께 성장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밀수>는 이 시스터후드를 생존이라는 절박한 맥락 속에 녹여냅니다. 김도훈 평론가는 "남성 영화의 의리가 명분과 위계에 기반한다면, 이 영화 속 여성 연대는 생계를 공유하는 동료애에서 출발한다"고 분석했는데요(출처: 씨네21), 저 역시 이 지점에서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직접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며 가장 뭉클했던 순간은, 춘자와 진숙이 물속에서 등을 맞대고 서로를 지키는 장면이었습니다. 말없이도 통하는 그 신뢰, 그리고 서로의 호흡을 읽으며 위기를 돌파하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거든요. 이건 단순히 비즈니스 파트너의 관계가 아니라, 같은 바다에서 같은 고통을 겪으며 쌓아온 진짜 '언니들'의 연대였습니다. 진숙은 표면적으로는 동료들을 챙기는 좋은 리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주변의 소문에 쉽게 휘둘리는 우직한 사람입니다. 춘자에 대한 오해도, 나중에 그 오해를 푸는 과정도 모두 타인의 말에 의존하죠. 반면 춘자는 검은 머리 짐승이라 불리며 배신자의 이미지를 뒤집어쓰지만, 실제로는 진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돌아온 인물입니다. 영화는 이 두 캐릭터에게 서로 모순되는 속성을 부여하며, "진실은 하나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실제로 류승완 감독은 전작 <모가디슈>에서도 "사랑하다 보니 진실이 두 개인 경우가 많습니다"라는 대사를 통해 이런 세계관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밀수> 역시 같은 맥락에서, 춘자와 진숙이라는 두 인물을 통해 선과 악, 배신자와 구원자라는 이분법을 거부합니다. 솔직히 저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춘자가 정말 순수한 의도로 군천에 돌아온 건지 완전히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원래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니까요. 영화 속 해녀들의 주요 활동 거점과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 군천항: 해녀들의 생계 터전이자 밀수의 시작점. 화학공장 건립 이후 오염된 바다.
- 수중 작업장: 중력이 아닌 부력이 지배하는 공간. 여성들이 권력을 되찾는 상징적 무대.
- 맹룡호: 엄 선장의 배이자 진숙이 최종적으로 선장이 되는 공간. 리더십의 계승을 상징.
70년대 복고풍 음악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장기하 음악감독이 선곡한 나미의 '미운 정 고운 정', 산울림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같은 곡들은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극의 감정선을 조율하는 핵심 장치였습니다. 특히 액션 장면에서 경쾌한 70년대 가요가 흐를 때 느껴지는 그 기묘한 리듬감은, 잔혹할 수 있는 폭력을 하나의 신명 나는 활극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밀수>는 제게 "함께 살아남는다는 것"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영화였습니다. 누군가를 끝까지 믿어본다는 것, 그리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거친 파도를 함께 헤쳐 나간다는 것. 류승완 감독은 이번에도 관객이 원하는 쾌감을 정확히 짚어냈고, 김혜수와 염정아는 그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연기로 화답했습니다. 올여름 극장가에서 진한 사람 냄새와 함께 짜릿한 액션을 동시에 느끼고 싶다면, <밀수>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을 것 같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B%B0%80%EC%88%98(%EC%98%81%ED%99%94), https://namu.wiki/w/%EB%B0%80%EC%88%98(%EC%98%81%ED%99%94)/%EB%93%B1%EC%9E%A5%EC%9D%B8%EB%AC%BC, https://www.youtube.com/watch?v=nGBUk-iw35k, 이동진 영화평론가 YouTube 채널, 씨네21 공식 홈페이지,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김도훈 평론가 SNS 및 칼럼, 장기하 음악감독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