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도 처음엔 그저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를 기대하고 영화관에 들어갔습니다. 왬(Wham!)의 'Last Christmas' 노래를 좋아하기도 했고, 에밀리아 클라크의 사랑스러운 연기를 기대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 예상과 전혀 다른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2019년 개봉한 <라스트 크리스마스>는 단순한 연애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심리적 치유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담은 성장 드라마였습니다. 영화는 런던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 뒤에 숨겨진 이민자 혐오와 노숙자 문제를 건드리며, 조지 마이클의 음악으로 모든 것을 감싸 안았습니다.
심장 이식과 생존자 죄책감, 그리고 케이트의 성장
영화의 주인공 케이트는 겉보기엔 그저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직장에서는 실수를 반복하고, 친구 집을 전전하며, 가족과는 제대로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죠. 하지만 영화 중반부에 밝혀지는 사실은 그녀가 과거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존자 죄책감(Survivor's Guilt)이라는 심리학 개념이 등장합니다. 생존자 죄책감이란 재난이나 사고에서 자신만 살아남았을 때 느끼는 심리적 고통과 자책감을 의미합니다(출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케이트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감당하지 못했고, 그 죄책감을 회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방어기제를 선택했던 겁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케이트의 행동이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냉소와 무책임은 사실 '완벽하게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결과였으니까요. 톰(헨리 골딩 분)이 그녀에게 "위를 봐(Look up)"라고 말하며 일상의 작은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장면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훼손된 자존감을 회복해가는 치유의 과정으로 다가왔습니다. 실제로 심리치료에서도 일상의 긍정적 요소에 주목하는 것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치료의 핵심 기법 중 하나입니다. 영화는 케이트가 노숙자 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타인을 돕는 행위가 역설적으로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 되는 거죠. 조지 마이클의 'Faith'나 'Freedom! '90' 같은 곡들이 그녀의 내면 변화를 대변하며, 음악은 단순한 배경음악(BGM)을 넘어 서사를 이끄는 핵심 장치로 기능합니다. 여기서 BGM이란 Background Music의 약자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깔리는 음악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조지 마이클의 노래는 단순히 분위기만 조성하는 게 아니라, 케이트의 심리 상태와 성장 과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서사적 언어였습니다. 케이트의 성장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심장 이식 후 생존자 죄책감으로 자기 파괴적 행동 반복
- 톰을 통해 일상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자존감 회복 시작
- 노숙자 쉼터 봉사를 통해 타인을 돕는 경험으로 심리적 치유
- 최종적으로 자신을 용서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
라스트 크리스마스 속 브렉시트 시대의 런던과 반전의 의미
이 영화가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2016년 브렉시트(Brexit) 전후 영국 사회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깔고 있다는 점입니다. 브렉시트란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한 정치적 사건을 의미합니다. 케이트의 가족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피해 영국으로 온 이민자 가정이고, 영화 곳곳에는 이민자에 대한 혐오와 불안이 묘사됩니다. 어머니 페트라(엠마 톰슨 분)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버스 안에서 외국어를 썼다는 이유로 공격받는 장면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 뒤에 숨겨진 냉혹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여기서 의구심이 생기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영화는 이토록 무거운 사회적 의제를 던지면서도, 결말에서는 케이트의 개인적인 선행과 '크리스마스 정신'이라는 추상적 가치로 너무 손쉽게 갈무리해버립니다. 가디언(The Guardian)의 피터 브래드쇼 평론가도 "정치적 소재들이 서사 속에서 충분히 소화되지 못한 채 장식처럼 쓰였다"고 지적했습니다(출처: The Guardian). 저도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에서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사회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심리적 극복으로 치환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요. 영화의 가장 큰 논란은 후반부의 반전입니다. 'Last Christmas, I gave you my heart'라는 가사를 문자 그대로 서사에 적용한 반전은, 어떤 관객들에게는 소름 돋는 감동을, 또 다른 이들에게는 당혹감을 안겨줍니다. 톰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판타지 또는 심리 드라마로 급격히 선회하죠. 저는 이 반전이 케이트의 성장을 극대화하는 강력한 장치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서사적 개연성 면에서는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톰과의 물리적 접촉이 있었던 장면들이 모두 케이트의 환상이었다는 설정은, 앞선 장면들을 다시 복기해봐도 완벽하게 정합적이지는 않았으니까요. 뉴욕 타임스의 마노라 다기스 평론가는 "노래 가사를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해석한 반전이 영화의 세련미를 해쳤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반전이 영화에 독특한 여운을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케이트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 자체가 충분히 가치 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끝내 사랑하게 만드는 건 조지 마이클의 음악과 런던의 아름다운 미장센(Mise-en-scène)입니다. 미장센이란 프랑스어로 '무대 위에 배치하다'라는 뜻으로, 영화에서는 화면 구성, 조명, 색채, 의상 등 시각적 요소 전체를 의미합니다. 런던의 코번트 가든과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들은 케이트의 초라한 일상과 대비되며, 그녀가 되찾아야 할 세상의 아름다움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합니다. 조지 마이클의 미발표곡 'This Is How (We Want You to Get High)'까지 포함된 OST는 단순한 배경음악을 넘어 케이트의 내면을 대변하는 언어로 기능하죠. 결국 <라스트 크리스마스>는 완벽한 영화는 아닙니다. 서사적 정합성에서 빈틈이 있고, 사회적 메시지를 다루는 방식도 다소 안이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돌보는 것이 곧 남을 돕는 시작"이라는 메시지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걸맞은 따뜻한 위로를 전달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 일상에서 놓치고 있던 작은 아름다움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됐습니다. 비록 모든 장면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어도, 케이트가 자신을 용서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따뜻한 경험이었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B%9D%BC%EC%8A%A4%ED%8A%B8%20%ED%81%AC%EB%A6%AC%EC%8A%A4%EB%A7%88%EC%8A%A4(%EC%98%81%ED%99%94), https://www.youtube.com/watch?v=ZazfN-oa_po, https://www.theguardian.com, The New York Times: Manohla Dargis의 영화 비평 "'Last Christmas' Review: All She Wants for Christmas Is Her Heart"., http://www.cine21.com, 심리학용어사전: '생존자 죄책감(Survivor's Guilt)'의 정의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관련 이론 참조., 이동진의 영화 평론 (B tv 영화당): 로맨틱 코미디의 변주와 음악 영화로서의 특징 분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