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단스크(Gdańsk)는 단순한 폴란드의 항구도시가 아닌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는 도시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역사적 장소이자 유럽 현대사의 큰 흐름을 바꾼 수많은 사건의 무대입니다. 중세 한자동맹 도시로 시작해,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국경 갈등과 나치즘의 확산, 유대인 학살, 그리고 폴란드 민주화 운동까지—그단스크는 시대마다 전혀 다른 얼굴로 역사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특히 역사학이나 유럽 정치, 국제관계, 인문학에 관심 있는 전공자라면, 단순한 여행지를 넘어 ‘현장 학습의 최적지’로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글에서는 전쟁사, 유대인 역사, 박물관 체험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역사 전공자를 위한 깊이 있는 Gdansk 여행 루트를 제안합니다. 단지 관광이 아닌, 과거를 배우고 현재를 성찰하며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전쟁사: 전쟁의 시작점, Westerplatte: 1939년 9월 1일의 총성
Westerplatte는 그단스크 항구 동쪽에 위치한 작은 반도로, 1939년 9월 1일 새벽, 나치 독일의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발포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장소입니다. 당시 단 200여 명의 폴란드 수비대가 독일군의 공격을 7일간 저지한 이곳은, 전쟁사에서 상징적인 장소로 남았습니다. 오늘날 이곳은 폴란드 전쟁영웅들을 기리는 야외 역사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약 2.5km에 걸친 산책로를 따라 당시의 병영, 탄약고, 벙커, 참호 등을 실제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곳은 언덕 위에 위치한 해안 방어자 기념탑(Monument to the Defenders of the Coast)입니다. 높이 약 25m의 이 석조 구조물은 바다를 등지고 서 있으며, 폴란드의 독립 정신과 항전의 의지를 상징합니다. 기념탑 근처에서는 매년 9월 1일에 공식 추도 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이 날은 폴란드에서 매우 엄숙하게 기념됩니다. 그 외에도 곳곳에 설치된 해설판, 영상 디스플레이, 모바일 앱 QR코드를 통해 전쟁 전후의 상황과 국제 정세까지 상세히 학습할 수 있습니다.
역사 전공자에게 Westerplatte는 단지 ‘전쟁이 시작된 곳’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곳은 20세기 국제질서가 무너진 순간, 조약과 외교가 무력으로 대체되던 순간, 그리고 그 결과로 수천만 명의 생명이 희생된 과정의 물리적 출발점입니다. 베르사유 조약, 자유시 단치히 문제, 폴란드 회랑 문제 등 다양한 배경지식을 함께 가지고 방문하면 더욱 풍부한 역사적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단스크 시내에서 버스로 약 30~40분 소요되며, 여름에는 유람선을 이용해 바다를 통해 접근하는 것도 추천됩니다.
유대인의 지구: 사라진 공동체의 기억
그단스크의 유대인 역사 역시 여행자들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중요한 테마입니다. 한때 번성했던 유대인 공동체는 현재 대부분 사라졌지만, 도시 곳곳에는 그들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단스크에는 중세부터 유대인이 거주해왔으며, 19세기 말에는 약 3,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며 상업과 교육, 문화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1939년 나치 독일의 점령과 함께 유대인은 추방·학살되었고, 이후 공산 정권 하에서도 복원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단스크 시내 중심에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과거에 위치했던 새 회당(New Synagogue) 자리에 설치된 기억의 표석이 있습니다. 폴란드어, 히브리어, 영어로 된 설명 패널이 설치되어 있으며, 당시의 사진과 함께 설명이 제공됩니다. 그 외에도 Wesoła Street와 Chełm 지역에는 오래된 유대인 묘지가 부분적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일부 비석은 복원 작업 중입니다. 특히 비석에 새겨진 유대 문양과 히브리어 문구는 단순한 묘비를 넘어, 사라진 공동체의 흔적을 고스란히 전해줍니다.
역사 전공자에게 그단스크의 유대인 흔적은 공간으로서의 역사, 부재의 기억, 타자의 목소리를 실감하게 합니다. 유대인 공동체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단지 건물의 흔적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과 현대 사회가 가져야 할 책임의식입니다. 나치즘, 반유대주의, 홀로코스트 등 유럽현대사를 관통하는 주제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여기이며, 각 장소를 방문할 때에는 가벼운 예의를 지키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습니다. 현지 가이드 투어나 유대인 역사 관련 팸플릿을 통해 좀 더 풍부한 설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박물관 : 몰입형 역사 체험의 장
그단스크에는 폴란드 내에서도 가장 현대적인 역사 박물관이 밀집해 있으며, 단순히 유물을 보는 전시를 넘어 몰입형 전시기법, 인터랙티브 체험, 감성적 연출을 통해 관람객이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들이 많습니다. 특히 역사 전공자라면 단순히 정보 습득을 넘어, 박물관이 역사를 어떻게 ‘전시하고 말하는가’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은 제2차 세계대전 박물관(Muzeum II Wojny Światowej)입니다. 2017년에 개관한 이 박물관은 폴란드 정부와 역사가들이 협업하여 구성한 방대한 전시 공간으로, 단일 주제를 이토록 깊고 넓게 다룬 사례는 유럽에서도 드뭅니다. 총 전시 면적은 5,000㎡ 이상이며, 약 18개 섹션에 걸쳐 전쟁 전후의 세계 정세, 나치 독일의 선전 전략, 민간인의 피해, 유대인 학살, 폴란드의 레지스탕스, 종전 이후의 정치 질서 등을 입체적으로 조망합니다.
전시 방식은 단순한 타임라인에서 벗어나, 감정과 윤리적 질문을 유도하는 구조를 택하고 있습니다. 실제 유대인 아동의 일기, 파괴된 거리의 복원 모형, 고문 기구와 생존자의 증언이 실린 인터뷰 영상 등은 관람객에게 깊은 충격과 몰입을 안깁니다. 박물관 입구부터 끝까지 관람하는 데는 3~4시간이 소요되며, 역사 전공자라면 하루 일정을 통째로 할애해도 아깝지 않은 수준입니다. 오디오 가이드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한국어까지 지원되며, 특히 대학생이나 연구자들을 위한 전용 리서치 패스도 신청 가능합니다.
이 외에도 유럽 연대 센터(European Solidarity Centre)는 폴란드 민주화 운동과 자유노조(Solidarność)의 역사를 전시한 공간으로, 정치사 및 동유럽 근현대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강력 추천됩니다. 1980년대 조선소 노동자들의 파업과 레흐 바웬사(Lech Wałęsa)의 리더십, 그리고 공산 정권의 붕괴까지—전시물 하나하나가 ‘한 도시가 역사의 물줄기를 어떻게 바꾸었는가’를 증명합니다.
그단스크는 단순한 관광 도시가 아니라, 전쟁과 독재, 자유와 평화를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역사 전공자라면, 이곳에서 보고 배우는 모든 순간이 강의실에서의 이론을 현실에 연결해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가 될 것입니다. 역사 전공자가 아니라도 이 모든 장소를 통해 역사 속 한 페이지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의 포화가 시작된 곳, 유대인의 흔적이 지워진 골목, 민중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룬 광장—이 모든 장소가 전공 지식의 심화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번 유럽 여행에서는 그단스크에서 진짜 ‘공부하는 여행’을 떠나보세요. 역사 속 사람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바닷바람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