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개봉 당시 저는 윤종빈 감독의 전작 범죄와의 전쟁이 워낙 강렬했던 터라 군도에 대한 기대치가 꽤 높았거든요. 막상 극장에서 첫 장면을 보는 순간, "아, 이건 내가 알던 사극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황량한 벌판 위로 울려 퍼지는 트럼펫 선율이 조선의 갓 쓴 사람들 위로 흘렀을 때, 그 낯섦과 흥분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장르 혼종의 실험: 조선 시대에 이식된 스파게티 웨스턴 문법
군도가 시도한 핵심은 '장르 혼종(genre hybridization)'이었습니다. 장르 혼종이란 서로 다른 장르의 문법과 미학을 의도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관람 경험을 창출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이 영화는 조선 철종 13년이라는 구체적인 역사 배경 위에 이탈리아산 마카로니 웨스턴, 즉 스파게티 웨스턴의 감각을 덧씌웠습니다. 여기서 스파게티 웨스턴이란 1960~70년대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서부극 장르로, 세르조 레오네 감독과 음악가 엔니오 모리코네의 협업으로 대표됩니다. 총 대신 칼, 황야 대신 지리산 자락이라는 치환만으로 그 쫄깃한 긴장감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식되는지, 제가 직접 극장에서 확인하고 나서야 믿을 수 있었습니다. 메인 테마곡으로 활용된 'I Giorni Dell'ira'는 원래 서부극 황야의 분노에 쓰인 곡입니다. 음악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지 명확히 선언하는 셈이었죠. 또한 영화는 전통적인 연대기 서술 방식을 버리고 챕터식 구성을 택했습니다. 챕터식 구성이란 하나의 연속된 흐름 대신, 독립적인 제목이 붙은 단락들로 서사를 분절하는 방식으로,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들이 즐겨 사용하는 서술 문법입니다. 제 경험상 이 방식은 활극 만화를 읽는 듯한 경쾌한 리듬을 주는 반면, 극의 흐름이 불필요하게 끊긴다는 양면성이 있었습니다. 비평적으로 짚어보자면 이 장르적 실험이 모든 관객에게 고르게 통한 건 아니었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 최종 누적 관객은 4,775,990명으로, 개봉 첫 주 약 363만 명을 끌어모은 뒤 2주차부터 급격한 낙폭을 기록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이 수치는 초반 화제성과 중후반 이탈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컸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저도 영화를 보고 나와서 옆에 앉았던 관객이 "뭔가 중간에 지루했다"고 말할 때, 그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도 장르 실험의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스파게티 웨스턴 음악 어법을 사극에 직접 이식 (메인 테마, 결투 씬 음악)
- 챕터식 서술 구조로 인물별 서사 분절
- 개틀링 기관총 등 시대 착오적 소품의 의도적 활용 (장고 오마주)
- 사투리와 조선 시대 언어를 활용한 현장감 강화
군도 민란의 시대 속 조윤이라는 빌런의 무게와 서사 불균형 문제
제가 이 영화를 보고 가장 오래 생각한 지점은 사실 주인공 도치가 아니었습니다. 강동원이 연기한 조윤, 그 캐릭터가 영화관을 나온 뒤로도 한참 머릿속을 맴돌았거든요. 이건 단순히 얼굴이 잘생겨서가 아닙니다. 조윤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서사적 깊이, 정확히는 결핍의 서사가 하정우가 연기한 도치의 복수 서사보다 훨씬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윤은 나주 대부호의 서자(庶子)입니다. 서자란 본처가 아닌 첩이나 기녀에게서 태어난 자식을 가리키는 조선 시대 신분 제도 용어로,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녀도 적자(嫡子)보다 한 단계 낮은 지위에 묶이는 구조적 차별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19세에 무관 급제를 이루고 조선 최고 수준의 검술을 갖췄음에도 아버지 조원숙에게 끝내 인정받지 못하는 장면들은, 이 인물이 왜 그토록 잔인한 방식으로 존재를 증명하려 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제 경험상, 좋은 악역은 관객이 그를 미워하면서도 연민하게 만드는 이중성을 품고 있어야 하는데, 조윤은 그 조건을 충분히 충족했습니다. 다만 이 지점이 동시에 영화의 가장 큰 서사적 아쉬움이기도 합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분류 기준으로 이 영화는 '사극 액션'과 '군상극(群像劇)'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합니다. 여기서 군상극이란 여러 인물이 각자의 서사를 갖고 동시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다중 주인공 구조를 말합니다. 지리산 추설의 멤버들인 대호(이성민), 이태기(조진웅), 천보(마동석), 마향(윤지혜), 땡추(이경영), 금산(김재영)은 각각 개성 있는 배우들이 연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윤의 존재감에 눌려 충분히 소화되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대호와 천보의 죽음은 감정적 여운보다 전투 스펙터클로 소비된 측면이 강했습니다. 한국영화학회 등재 논문에서도 군도의 서사 구조에 대해 "의적 집단 서사와 개인 복수 서사가 통합되지 못하고 병렬적으로 진행된다"는 분석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학술정보원). 저도 이 분석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조윤의 서사를 따라갈 때와 도치의 서사를 따라갈 때 영화의 밀도 차이가 느껴졌거든요. 마지막 대결에서 도치가 조윤에게 결정타를 가하지 않고 일종의 성장을 보여주는 선택을 하는 장면도, 감정선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져 설득력이 조금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의적 활극이라는 장르 안에서 계급 모순을 정면으로 다루고, 백정 출신 도치와 서자 출신 조윤의 대결을 통해 조선 사회의 신분제적 모순을 시각화한 시도는 상업 영화로서 드문 정직함을 보여줬습니다. 군도가 남긴 것은 꽤 선명합니다. 한국 사극이 고증과 장중함으로만 승부할 필요가 없다는 걸 증명했고, 그 도전이 477만 명이라는 관객 수로 일정 부분 검증되었습니다. 지금 다시 보면 아쉬운 부분이 눈에 더 들어오는 건 사실이지만, 그 발칙한 시도 자체를 무효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조선 사극에 트럼펫이 울릴 수 있다는 걸 처음 보여준 영화, 그것만으로도 군도는 한국 영화사에서 꽤 의미 있는 자리를 차지합니다.
참고: http://www.cine21.com/, https://www.kobis.or.kr/, 이동진의 영화평론: 군도: 민란의 시대 별점 및 캐릭터 조윤의 미학적 분석 (B tv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참조), https://www.koreafilm.or.kr/, https://www.kci.go.kr/, https://namu.wiki/w/%EA%B5%B0%EB%8F%84:%20%EB%AF%BC%EB%9E%80%EC%9D%98%20%EC%8B%9C%EB%8C%80, https://www.youtube.com/watch?v=Z-RTpuZcdu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