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밸런타인데이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친구가 "재밌었어?" 하고 물었을 때, 저는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나쁘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좋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느낌. 2018년 2월 개봉한 골든슬럼버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서며 느꼈던 감정이 딱 그랬습니다. 이 글은 그 애매함의 정체를 좀 더 제대로 파헤쳐보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골든슬럼버, 리메이크 기획의 배경, 그리고 그 무게
골든슬럼버는 이사카 고타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2010년 일본에서 먼저 영화화된 작품을 한국이 다시 리메이크한 영화입니다. 리메이크(remake)란 기존 작품을 새로운 시장이나 문화권에 맞게 재제작하는 방식을 말하는데, 단순히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배경, 인물, 갈등 구조까지 현지화해야 하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리메이크는 원작의 장점을 살리면서 새로운 맥락을 설득력 있게 덧입히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일본판은 총리 암살이라는 설정을 썼고, 한국판은 유력 대선 후보 암살로 바꿨습니다. 이건 사실 꽤 영리한 판단입니다. 한국에서 총리는 실질적인 국가 권력의 정점이 아니니까요. 배경도 광화문 광장으로 옮겨왔고, 추격 세력도 경찰 중심에서 국정원 중심으로 바꾸며 한국적 정치 맥락을 집어넣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 설정 변경을 들었을 때는 "오, 제법인데?" 싶었습니다. 문제는 이 기획의 뼈대가 아니라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생겼습니다. 원작 소설은 서스펜스(suspense)보다 드라마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서스펜스란 관객이 위협의 실체를 알고 있는데 주인공은 모르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을 말합니다. 히치콕이 평생 강조한 개념이기도 한데, 원작 소설은 이 긴장감을 일부러 낮추고 대신 인물들의 연대와 우정에 집중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한국판은 여기서 욕심을 냈습니다. 서스펜스도 살리고, 액션도 넣고, 청춘 드라마도 하고, 감동까지 뽑겠다는 욕심이었습니다. 53억 원의 제작비와 손익분기점 270만 명이라는 숫자를 보면, 그 욕심이 어디서 왔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KOFIC).
장르 균형의 실패, 숫자가 증명한다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를 두고 블랙 팬서와의 맞대결 탓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런데 데이터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개봉 2주차 관객 수는 1주차의 약 25% 수준으로 급감했습니다. 입소문이 나쁜 영화의 전형적인 감소 곡선입니다. 최종 누적 관객 수는 약 138만 명으로, 손익분기점 270만 명의 절반을 갓 넘겼습니다. 외부 요인보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 문제가 더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가장 당황했던 순간은 도주 장면 중간에 갑자기 음악이 바뀌며 수학여행 추억 장면이 끼어들 때였습니다. 긴장감이 뚝 끊겼습니다. 이건 편집상의 실수가 아니라 애초에 시나리오 구조 자체의 문제였습니다. 두 개의 다른 영화가 한 편 안에 공존하고 있었고, 둘 다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었습니다. 스릴러 파트에서도 개연성 문제가 컸습니다. 국정원이라는 조직이 안면인식 프로그램(facial recognition system)까지 동원하면서, 정작 핸드폰 위치 추적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다는 설정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안면인식 프로그램이란 카메라 영상에서 특정 인물의 얼굴을 자동으로 식별하는 기술인데, 2018년이면 스마트폰 추적이 훨씬 간단하고 빠른 방법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이런 허점이 하나둘씩 쌓이면 관객은 영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구경만 하게 됩니다. 이 영화가 하나의 장르에 집중하지 못하면서 발생한 문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스릴러 장면 중간에 갑작스럽게 삽입된 추억 회상 씬이 긴장감을 단절시킨다
- 악당 세력(국정원)의 행동 논리가 일관되지 않아 위협감이 희석된다
- 주인공 건우의 캐릭터가 '선량함'과 '납득 불가한 판단력 부재'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 민씨(김의성 분)의 희생이 왜 이루어지는지 서사적 근거가 불충분하다
한국 영화 리메이크의 성공 사례들을 보면, 원작의 핵심 정서는 유지하되 장르 선택을 명확히 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골든슬럼버는 그 선택을 끝까지 미룬 채 개봉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럼에도 남는 것, 비틀즈 저작권료와 온기의 가치
영화적 완성도와 별개로, 골든슬럼버에는 분명히 남는 것들이 있습니다. 비틀즈의 'Golden Slumbers'를 삽입하기 위해 당시 한국 영화 사상 최고 수준의 음악 저작권료를 지불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작권료(copyright royalty)란 원작자가 창작물의 사용을 허가하는 대가로 받는 금전적 보상을 말합니다. 강승윤과 이하이가 새롭게 불러낸 그 버전은, 영화의 문제점들을 잠시 잊게 만들 만큼 감정적으로 강렬했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만큼은 진짜로 코끝이 찡했습니다. 광화문 광장에서의 폭발 씬 촬영은 한국 영화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로케이션 촬영(location shooting)이란 스튜디오가 아닌 실제 장소에서 촬영하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현장감과 사실성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추격전은 시각적으로 충분히 박진감 있었고, 익숙한 공간이 낯설고 위험한 장소로 변하는 경험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술적 성취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 건 비틀즈 선율과 함께 떠오르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라는 감각입니다. 한국인의 집단적 향수 코드를 건드리는 방식만큼은 제대로 작동했습니다.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이 영화는 개봉 당시 관람객 평점과 평론가 평점 사이에 꽤 큰 간극을 보였는데(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그 간극 안에 이 영화의 본질이 있습니다. 계산적이기보단 감정에 솔직한 관객들에게는 분명히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골든슬럼버는 결국 욕심이 과했던 영화입니다. 스릴러이고 싶었고, 청춘 드라마이고 싶었고, 사회비판이고 싶었고, 우정 영화이고도 싶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해내려다 어느 것 하나 충분히 해내지 못한 채 막을 내렸습니다. 그래도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오랜 친구에게 연락하고 싶어졌다면, 그건 영화가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날 밤 실제로 고등학교 친구 하나에게 먼저 카톡을 보냈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A%B3%A8%EB%93%A0%20%EC%8A%AC%EB%9F%BC%EB%B2%84(2018%EB%85%84%20%EC%98%81%ED%99%94), https://www.youtube.com/watch?v=uisC3v7c3h4, 씨네21 (Cine21): [비평] 골든슬럼버, 착함이라는 무기가 시스템을 이길 수 있을까 (송경원 평론가), 영화진흥위원회 (KOFIC): 한국 영화 제작 현황 및 2018년 상반기 결산 리포트, 한국영상자료원 (KOFA): 일본 소설 리메이크 영화의 한국적 변용에 관한 고찰, 이동진의 영화평론: 골든슬럼버 별점 및 캐릭터 중심의 서사 분석 (B tv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참조), 맥스무비 (Maxmovie): 골든슬럼버 노동석 감독 인터뷰 - 원작과의 차이점과 연출 의도